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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삼역 3번 출구엔 ‘행복 김밥’이 있습니다

venhuh 2008. 1. 12. 01:30

[week&트렌드] 역삼역 3번 출구엔 ‘행복 김밥’이 있습니다

2008년 1월 11일(금) 12:53 [중앙일보]


[중앙일보 유지상.권혁재] 그 아가씨는 오이김밥, 저 아저씨는 부추김밥7일 오전 8시쯤 서울 지하철 역삼역 3번 출구 한솔빌딩 옆 골목. 우르르 쏟아져 나와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샐러리맨들 사이로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휴일 잘 지내셨어요?” “얼굴 좋아지셨네요.” “출장 잘 다녀오셨어요?” 사람들에게 건네는 젊은 남자의 인사말이 다 다르다.

“네, 고마워요.” 아가씨 하나가 1000원짜리 한 장을 내밀고는 그에게서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받아간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예, 밀린 서류 때문에….” 넥타이를 맨 아저씨도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봉지를 받아간다.

봉지 속에 든 것은 은박지에 싼 김밥 한 줄. 사무실이 몰려 있는 지하철 출구라면 이 시간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런데 거래가 특이하다.

손님은 주문을 하거나 값을 묻지 않는다. 주인은 돈 받는 데 개의치 않는다. ‘주면 좋고 안 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손님이 1만원짜리를 건네자 잔돈 바꿀 짬이 없다며 돌려주기도 한다. 생각나면 나중에 달란다. 언제 봤다고 사람을 이렇게 덜컥 믿어버리나 싶다. 다른 점이 또 하나 있다. 웃는 얼굴과 밝은 대화다.

김철한(33)씨가 이 이상한 거래의 주인공이다.

“아까 그 아가씨는 개운한 오이 맛 김밥만 드세요, 그리고 저 아저씨는 부추김밥을 좋아해요.” 손님의 취향을 기억했다가 척척 김밥을 건네는 것이다.

미니스커트 차림의 아가씨가 다가오자 “머리끈이 달라졌네요”라고 관심을 보인다. “지난 주말에 애인이 사줬어요. 아저씨 많이 파세요.” 뒤따라가 물었다. 지하철 출구 바로 앞에서도 김밥을 파는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와 사느냐고.

“맛도 맛이지만 아저씨의 관심이 반갑잖아요. 기분 좋은 말 한마디 들으면 하루가 즐거워요.”김씨는 5년째 아침마다 이 자리에 선다. 역삼역 3번 출구 에스컬레이터 공사를 할 때부터였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을 10개월이나 지키며 공을 들였다. 공사가 끝나 장사를 할 만하자 여기저기서 생각지 않던 어려움이 생겼다. 바로 옆자리에 ‘반값’김밥이 등장했다. 구청에서 나온 단속반에 김밥을 빼앗긴 적도 여러 번이다.

“길거리에서 돈을 벌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는 주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특히 가까운 음식점이나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에겐 철저하게 이 원칙을 지켰지요.”

새벽 2시 반 일어나 출근길 두 시간 장사손님이 뜸한 틈을 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꾸벅 인사를 한다. 인근의 주차장 관리인 아저씨다.

“쌍둥이 아빠 김밥이요? 거리에서 팔지만 위생 걱정 안 해도 돼요. 손님이 많으니 재료가 신선하지 않겠어요? 또 매일 보니 좋은 재료만 쓸 거란 생각이 들거든요.”

그 아저씨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밥 두 줄을 봉지에 넣고 뛰어가는 그는 갑자기 비나 눈이 오는 날엔 우산까지 챙겨주는 고마운 분이란다. 받은 돈은 1000원, 50% 할인인 셈이다. 어린 학생·임산부도 자기 김밥을 먹어주는 게 고마워 같은 값을 받는단다.

김씨는 세 아이 아빠다. 다섯 살짜리 두 아들 은택·영찬이는 쌍둥이다. 막내딸이 돌을 갓 지났다. 가족 얘기가 나오니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6년 전 결혼했다. 아내가 9남매의 막내이고, 그가 4남매의 막내다. 집안 형편이 넉넉잖아 일찌감치 돈을 벌러 나섰다. 약품 배달, 건설현장, 과일드레싱 판매 등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일했다. 그러다 김밥 장사를 시작했다.

터줏대감들에게 밀려 쫓겨나기도 했다. 지금의 자리에 애착이 가는 이유다. 이 때문에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면 발 벗고 나서 돕는다. 서울 시내에 그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15명가량 된다.

“하루 250~300개 팔아요. 두 시간 장사로 따지면 쏠쏠한 편이지요.” 한 줄 김밥은 고소한 오이, 개운한 오이, 맛있는 부추가 있다. 여기에 2000원짜리 도시락 김밥(참치김밥 반 줄+치즈김밥 반 줄)과 1000원짜리 카레 주먹밥(3알), 김치김밥 등 모두 여섯 종류를 판다.

그가 일어나는 시간은 새벽 2시 반. 밥을 지어 3시에 양념을 하고 30분 뒤 아내와 함께 김밥을 말기 시작한다. 길동 집에서 역삼역으로 떠나는 시간이 6시30분이다.

오전 9시30분 즈음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가락동 시장에 들러 장을 본다. 집에 가자마자 재료 손질을 마치고 잠시 잠을 청한다. 일하는 틈틈이 대학에 다니며 김씨는 지난해 2월 늦은 학사모를 썼다.

단골 중엔 김밥 두 줄로 아침과 점심을 해결하는 여성들이 있다. 다이어트 때문이 아니라 생활이 팍팍하기 때문일 거란다. 자꾸만 오르는 재료비 때문에 화가 나기도 한다. “아침 장사 잘되면 저야 고맙지만 그게 꼭 좋은 건 아닌 듯싶어요. 모두들 집에서 따뜻한 아침 먹고 나오는 게 좋은 세상 아닐까요?”

유지상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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