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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모음] 어린이 도와오다 숨진 ‘기부천사’ 배달원 추모물결.. #강남당 #나눔

venhuh 2011. 9. 28. 15:58


[오늘의 세상] 철가방 아저씨는, 이 쪽방에서 '낮은 곳'을 보듬었다
 


매달 70만원 벌며 기부… 세상을 떠난 후, 세상을 부끄럽게 하다

짜장면 배달원 김우수씨의 마지막 흔적
그의 책상, 외롭지 않았던… 후원했던 아이들 3명의 사진
액자 속에 덩그러니… 서랍엔 보물같은 아이들 편지
그의 옷, 부끄러움 없었던… 대통령 초청때도 배달복 입어 "평소의 모습이 제일 떳떳해" 
그의 일상, 외로움과 싸웠던… 휴대폰엔 저장된 번호 없어, 영화 관람이 유일한 취미

한달 70만원 벌이의 변두리 중국집 배달부. 창문도 없는 4.95㎡(약 1.5평)짜리 고시원 쪽방에 살면서 어려운 형편의 어린이들을 돕던 후원자. 7세 때 고아원에 버려져 지난 24일 교통사고를 당한 뒤 이틀간 아무도 찾지 않은 병실에서 쓸쓸하게 숨진 사람. 김우수(54)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중국집 '동보성'은 김씨가 지난 5년간 주말마다 배달부로 일한 곳이다.

가게는 33㎡(약 10평) 크기에 불과하다. 주인 이금단(45)씨는 "김씨 아저씨는 출근 시각보다 한 시간 일찍 가게에 나와 영업 준비를 하던 사람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쪽방에 몸 누이고… 책상엔 후원했던 아이들 사진이… 김우수씨가 살던 서울 논현동의 고시원방. 창문도, 화장실도 없는 이 방은 1인용 침대와 간이 책상과 옷장 하나가 들어갈 공간이 전부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성실했던 김씨는 유품이 된 지갑 속에 5000원권 3장과 1000원권 45장을 남겼다. 다음 날 배달에 필요한 거스름돈으로 쓰려고 미리 준비해 놓은 돈이었다. 김씨는 주말마다 오전 8시부터 13시간 배달일을 하고, 오후 9시 일당 9만원을 받아 마을버스를 타고 아무도 없는 고시원 쪽방으로 돌아갔다.

월세 25만원 고시원 쪽방 

동보성에서 마을버스 열다섯 정거장 떨어진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고시원 구석 방. 김씨는 창문도 없는 좁은 방에서 4년 전부터 월세 25만원을 내고 살았다.

27일 주인을 잃은 방 한쪽에 놓인 책상 위에는 그가 후원해 온 아동 3명의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가 놓여 있었다. 책상 서랍에는 후원했거나 후원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받은 감사편지들이 보물처럼 놓여 있었다. "용돈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게임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매일 노는 것은 아니에요." "보내주신 14.25달러로 가족을 위한 옷과 농작물을 구입했습니다. 항상 후원자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에티오피아 후원아동)" "후원자님 언제나 저의 마음을 알아주셔서 감사드려요."

 김우수씨의 책상에는 후원하던 아이들로부터 받은 편지가 보관돼 있었다. 철자법도 틀린 편지들이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그의 외로운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그는 이 사연들을 몇 번이나 읽었을까.
김씨는 158㎝, 55㎏의 작은 체격이었고, 웃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2~3벌뿐인 옷은 언제나 깨끗이 빨아서 입었다.

동보성 주인 이씨는 "2009년 연말에 나눔을 실천하는 시민들을 대통령이 초청한 적이 있어요. 다들 잘 차려입고 가라고 했지만, '평소 내 모습이 제일 떳떳하다'면서 배달 일할 때 입는 검은색 옷을 입고 갔어요. 꾸미지 않는 사람이었어요"라고 했다. 고시원 총무 박모(34)씨는 "월세도 한 번 밀린 적 없고, TV를 볼 때면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볼륨을 최대한 줄여서 보던 사람"이라고 김씨를 기억했다.

하루 담배 두 갑 피우던 사람이… 

김씨는 지난 2006년부터 매달 5만~10만원을 어린이재단을 통해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을 후원하는 데 썼다. 하루에 담배 2갑을 피우고, 소주 2병을 마셨지만, 아이들 후원을 시작하면서 "술, 담배 살 돈이면 1명 더 도울 수 있다"며 모두 끊었다.

 대통령 초청에도… "평소 내 모습으로"… 김우수(오른쪽 두번째)씨는 지난 2009년 12월 나눔을 실천하는 시민으로 선정돼 청와대 오찬에 초대받았다. 주변에서는 “대통령 만나는데 잘 차려입고 가라”고 했지만, 그는 배달일을 할 때 입는 검은색 옷에 모자를 쓰고 갔다. 그는 “평소의 내 모습이 제일 떳떳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이재단 관계자는 "고인이 형편이 좋을 때는 국내·외 아동 5명을 후원하다가 최근에는 생활이 어려워져 1명으로 줄였지만, 한 번도 후원금이 밀린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나머지 돈으로는 매달 20만원씩 납입하는 연금보험과, 12만1000원을 붓는 종신보험을 들었다. 종신보험 4000만원은 어린이재단이 받도록 해놨다. 사후 장기 기증도 서약했다.

동료 배달원 황대식(31)씨는 "김씨 아저씨는 언제나 '내가 인생을 제대로 살게 된 건 후원아동 덕분'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했다.

배달일을 하지 않는 평일에는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신문 경제면을 보면서 전 재산인 300만원어치 주식이 올랐는지, 떨어졌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하는 조조영화를 혼자서 보는 것이 낙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영화를 봤다.

영화관을 나서면서는 2000원짜리 스포츠복권을 1장 사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집 동료들은 "'당첨금액이 큰 로또를 사지 그러느냐'고 말하면, '내 운이 거기까지는 닿지 않을 것 같다'며 웃곤 했다"고 말했다.

오후에는 자전거로 한강변을 달렸고,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의정부, 속초 등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집 근처 풍물시장에서 혼자 쇼핑하면서 1만~2만원짜리 운동화, 옷가지를 샀다. 동료 박산(37)씨는 "'좋은 물건 샀다'며 새 시계를 찬 팔목을 불쑥 내밀던 아이같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고아원에 버려졌던 인생인데

가족이 없는 김씨의 시신은 장례 절차를 밟지 못하고 27일까지도 서울 광진구 혜민병원 영안실에 있다. 김씨가 일했던 중국집 동보성 이금단 사장은 "평생 외롭게 산 사람인데 죽어서까지 가족 없는 설움을 받는다"면서 눈가를 훔쳤다. 어린이재단이 김씨의 장례를 치르기로 해 28일 빈소가 서울 대림동 서울복지병원에 마련된다.

그는 평생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단 하나의 단축 번호도 저장돼 있지 않았다. 단 한 통의 문자 메시지도 없었다. 부산이 고향인 김씨는 미혼모의 아이였고, 7세에 고아원에 맡겨졌다.

12세 때 고아원을 뛰쳐나온 탓에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구걸, 양조장 허드렛일, 시장 지게꾼 등 어렵고 힘든 생활을 했다고 주변에서 말했다. 소년원도 몇 차례 다녀왔고, 지난 2005년에는 한 술집에서 "나를 무시하느냐"며 불을 지르려다 1년 6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자포자기했던 김씨는 감방 안에서 어린이재단이 발간한 잡지 '사과나무'를 읽고 인생을 새로 살기로 했다. 주위 사람들은 "잡지에서 불우한 환경에 처해있는 어린이들의 사연을 읽고 며칠을 울었다고 하더라"고 했다. 돕고 싶은 아이들이 생기자 제대로 살고 싶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제2의 인생, 그의 마지막 5년은 세상 누구보다 뜨거웠다. 쪽방 구석 사진 속의 그가 기자에게 물었다. "나는 행복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기사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28/2011092800149.html


관련기사: http://news.donga.com/Society/New/3/03/20110928/40660288/1


[뉴스 따라잡기] ‘기부 천사’ 중국집 배달부의 죽음

                                                                                                                  


<앵커 멘트> 

평소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해 기부해오던 50대 중국집 오토바이 배달부의 쓸쓸한 죽음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망할 경우 지급받을 보험금 마저 어린이재단에 맡겨둔 사연이 알려지면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는데요. 

정수영 기자 남다른 중국집 배달부의 사연 자세히 소개해 주시죠. 

숨진 중국집 배달부는 오토바이 배달을 하던 중 교통 사고를 당했습니다. 가족도 친척도 없이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말았는데요. 

고인의 유품에서 보험증서 한 장이 나왔습니다. 사망시 지급받을 보험금은 모두 불우한 어린이를 돕는 재단에 맡긴다는 문서였습니다.

생전에는 비좁은 고시원에서 한 달 70만원 남짓한 수입으로 생활했지만 기부를 거르는 적이 없었습니다. 

고인이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면서 인터넷에서는 누리꾼들의 추모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리포트>

지난 23일 밤 8시 서울 일원동 한 교차로에서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승용차와 충돌했습니다. 

<녹취> 전 00(교통사고 현장 목격자) : "차랑 부딪히고 오토바이는 완전 박살났고요, 아저씨는 그냥 엎어져서 쓰러져 있었는데 피가 많이 흘렀어요. (피가)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거의 입에서 토한 것 같더라고요."

오토바이 운전자 54살 김우수 씨는 사고 직후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부상이 워낙 심해 수술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녹취> 김경원(경사/ 수서경찰서 교통사고 조사계) : "머릿속에 피가 고여 있어가지고 그 안에서 핏줄이 터져가지고..."

사고 이틀만인 지난 25일 밤 11시쯤, 부모도 친지도 없었던 50대 중국집 배달부 김 씨는 병상에서 홀로 숨을 거뒀습니다. 

<녹취> 김경원(경사/ 수서경찰서 교통사고 조사계) : "동사무소에 재적등본에 가족관계서 떼어 봐도 같이 등록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연고가 없어서) 지금 (장례를) 못 치르고 있고."

평소 김 씨가 기거하던 고시원을 찾았던 중국집 사장은 고인 유품을 정리하다 문서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자신이 사망할 경우 보험금 4천만 원 전액을 어린이 재단에 지급하도록 해 달라는 보험 증서였습니다.

<인터뷰> 이 00(중국집 주인) : "그것은 저도 몰랐는데...그 아저씨가 종신보험까지 들어서 애들 앞으로 해놨네..어린이 재단, 그쪽으로."

고 김우수 씨는 지난 2006년부터 어린이 재단과 인연을 맺고 불우한 어린이 5명을 위해 다달이 후원금 10만 원을 기부해 왔습니다. 

<인터뷰> 고시원 관계자 (음성변조) : "한 달에 제가 알기로는 (어린이) 한 명당 1인 계좌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다섯 명이니까 10만원 되는 것이고.. 2007년인가부터 쭉 (기부) 하신거죠."

중국집 배달 일을 하며 김 씨가 받는 월급은 70만 원이었고 몸을 간신이 누일만한 7제곱미터짜리 고시원에 기거했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어린이들을 위한 지원은 거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故 김우수 씨(지난 2009년 12월 생전) : "큰 돈은 아니지만 아동들을 후원하고 나서는 헛돈은 안 쓰게 되더라고요." 

고인은 평소 집도 가족도 없었고 한 때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일곱 살부터 고아원 생활을 시작했고 구걸과 노름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난 2004년에는 직장에서 시비 끝에 방화까지 저질렀습니다. 

<인터뷰> 중국집 관계자 : "자기는 혼자라고 그랬어요. 어렸을 때부터. 13살때부터 잘못 빠져들어서 감방에도 갔다 나왔다고 말 하더라고요... (방화는)술김에 한번 그랬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징역 일 년 반을 선고 받고 수감 생활을 하던 김 씨는 어느 날 우연히 기사 하나를 읽고 마음이 크게 움직였습니다. 아동학대와 가난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한 재단을 통해 불우한 아이들을 후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터뷰> 故 김우수 씨(지난 2009년 12월 생전) : "(교도소)거기 갔다 오고 나서 180도 바뀌었습니다. 생활방식이. 담배 피우던 것도 끊게 되고요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 주위를 돌아보게 되었고요."

출소 후 부지런히 중국집 배달로 돈을 모았고, 기부 두 달 만에 후원하던 아동으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게 되며 김 씨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인터뷰> 이서영(어린이재단 언론팀) : "2009년에 (후원자를) 만난 걸로 알고 있어요. 김우수씨도 가족이 없으셨고, 어렵게 사는 친구, 그 친구한테 더 도움이 되고 싶고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남다르게 하셨던 것 같아요."

70만 원 남짓한 월급으로 고시원 월세며 생활비 쓰기도 빠듯했지만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한 푼 두 푼 아끼고 아껴 기부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이 00(중국집 주인) : "(옷은) 벼룩시장 같은데서 동대문 이런 곳에서 다 사셨어요. 이때까지 택시를 타본 적이 없데요. 본인이 사는 동안 편안하게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고 그만큼 남으면 애들한테 돌려주고 싶다고."

<인터뷰> 이서영(어린이재단 언론팀) :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후원금을 거르지 않으셨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9월달 후원금도 저희 어린이 재단에 전달해 주셨어요."

김 씨는 금전적인 후원뿐만 아니라 자신이 숨질 경우 장기마저 기증하겠다고 서약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돌봐줄 이 하나 없이 숨지는 바람에 빈소조차 마련되지 않았던 고인을 위해 어린이 재단이 나서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인터뷰> 이서영(어린이재단 언론팀) : "장례절차는 재단을 비롯해서 장례와 관련해서 그런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여러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병원에 빈소가 마련 되었고요. 목요일 발인 예정에 있습니다."

김 씨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넷 게시판과 트위터에는 김 씨를 추모하며 가슴아파하는 누리꾼들의 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도 친척도 없이 홀로 살아가며 중국집 배달로 고단해진 몸을 누이던 고시원 방은 이제 텅 비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고인이 생전에 수없이 바라보았을 후원하던 어린이 5명 사진들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인터뷰> 故 김우수 씨(지난 2009년 12월 생전) : "남을 후원 한다는 것이요 여유가 있어서 돕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어려운 형편에서 조금 그것을 해 가지고 도울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보다 외롭고 고단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불우한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서 행복을 찾았던 고인의 삶은 기부의 참뜻이 무엇인지 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입력시간 2011.09.28 (08:58)   정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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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우수 후원자님의 명복을 빕니다.

https://www.childfund.or.kr/campaign/camRunningView.do?campaignSearchBean.cpId=1000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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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업무시간중 잠시 쉬면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뉴스를 잠시 보다가..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사 하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이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시다니... 정말 안타까운 소식에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저장해서 다시 꺼내보고 싶은 기사가 있어 이 소식을 스크랩, 저장합니다. 

있는자, 가진 자, 권력을 쥔 자도 오직 자기것만을 취하며 이 사회의 소외받는 이웃들을 철저히 외면하며 기부를 안하는 세상. 간혹 이런 낮은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아낌없는 사랑으로 나눔, 기부소식을 접할 때마다 어서 빨리 우리 사회에도 나눔, 기부문화가 자리잡아야 할텐데..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밝은 미소로 자신의 일을 묵묵히 선행을 해오셨던 이 분의 아픈 소식에 마음이 한없이 저며옴을 느낍니다. 부디 좋은 곳에 가셔서 영면하시옵소서. 삼가 명복을 빕니다. 편히 쉬시옵소서.... 


2011년 9월 어느날 오후에...

@venh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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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커뮤니티- 트위터 강남당 나눔소모임에서도 앞으로 작은 것 부터라도 모여서 나눔,기부,봉사활동을 하고저 합니다. ==> http://j.mp/axT6Og 

좋은 의견, 제안주실 분은 강남당의 나눔소모임에 가입하셔서 좋은 의견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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