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닷컴│유정선기자] # 장면 1. 며느리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시어머니가 있다. 그야말로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을 강요한다.
# 장면 2.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서로를 의지한다. 살얼음판 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힘이 된다. 아픔을 보듬고 감싸는 사이다.
장면 1과 장면 2는 어떤 드라마 속 이야기일까. 복종을 강요하는 전통적인 고부관계는 현대극 '엄마가 뿔났다'의, 평등과 존중을 추구하는 현대적 고부관계는 사극 '대왕세종'의 한 장면이다.
현대극과 사극이 뒤바뀌었다. 물론 드라마 속 인물에 한해서다. 대개 현대극하면 진보를, 사극하면 보수를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는 다르다. 현대극 속 인물관계가 사극 속 관계보다 오히려 더 고리타분하다.
현재를 반영하는 현대극과 과거를 담는 사극이 이처럼 거꾸로 행보를 보이는 까닭은 왜 일까.
◆ 고부관계…현대물 '복종' vs 사극 '공감'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과거 대부분의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좋은 관계를 갖지 못했다. 늘 고부갈등이 존재했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 속 고부갈등은 과거를 다룬 사극보다 현재를 다룬 현대물에서 더 심하다.
우선 KBS 2-TV 주말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이하 엄뿔). 극중 시어머니는 현대적인 감각을 뽐내는 신세대 어머니다. 그러나 며느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 소유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패션에서 취미까지 며느리는 무조건 시어머니의 취향과 기호를 따라야 한다.
반면 사극 속 고부관계는 다르다. KBS-2TV 주말사극 '대왕세종'이 대표적인 예. 시어머니의 경우 조언은 있되 결코 강요는 없다.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한 고부관계인 셈. 실제로 소헌왕후와 원경왕후는 사이가 좋았다는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 '대왕세종'은 현대에서나 볼 수 있는 발전적인 고부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 애정관계…현대물 '참을 인' vs 사극 '신여성'
애정관계에 있어서도 다르다. 사극에서의 남녀관계가 훨씬 진보적이다. 사극 속 여성은 오히려 사랑 앞에 당당하다. 그러나 최근 현대극 속 남녀관계는 얽히고 설키긴 했지만 고리타분하기 짝이없다.
SBS-TV 수목 사극 '일지매'는 현대적 남녀관계를 그리는 대표적 드라마다. 사랑에 있어서 여성은 할 말을 다한다. 엇갈리는 사랑에 답답해 하며 "내 마음을 가져갔으니 책임지라"고 말하는 식이다. 과감한 애정 표현도 먼저한다. 일지매에게 먼저 입을 맞춘 것도 봉순(이영아 분)이다.
반대로 현대극 속 남녀관계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남자는 늘 자기 멋대로였고 속으로 끙끙 앓는 건 여자의 몫이었다. SBS-TV '조강지처 클럽'이 특히 심하다. 최근 조강지처의 복수와 바람남의 최후가 그려지고 있긴 해도 그 전까지만 해도 아내는 늘 남편의 구박을 감내해야 했다.
◆ 뒤로 가는 현대극 vs 앞으로 가는 사극
한 방송 관계자는 사극 속 인물관계의 변화를 시대적 요구라고 말했다. 그는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여리다는 공식이 깨진지 이미 오래됐다"며 "이같은 캐릭터의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관계자 이어 사극의 시청층 다변화를 또 하나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사극을 즐기는 시청자 층이 넓어지면서 사건은 역사에 기초하되 캐릭터는 현재에 충실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폭넓은 공감대를 위해서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반대로 현대극 속 과거 인물 설정은 갈등구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시대와 상황의 아이러니를 불러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인 셈이다. 한 대중문화 평론가는 "흔히 '욕하면서 본다'는 말을 한다. 현대물에 등장하는 구시대적 인간관계야 말로 가장 욕먹을 거리"라며 시청자의 흥분을 유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