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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트태권V’ 청사진, 흠잡을 구석 전혀 없다

venhuh 2008. 2. 3. 15:37

‘로보트태권V’ 청사진, 흠잡을 구석 전혀 없다

2008년 02월 03일 (일) 10:52   뉴시스

【서울=뉴시스】 “아무도, 그 무엇도 알 수 없다.” ‘내일을 향해 쏴라’, ‘대통령의 음모’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두 번씩이나 수상한 할리우드 각본가 윌리엄 골드먼의 코멘트다. 그 어떤 것도 예측불가능한 대중문화산업 일면을 꿰뚫는 할리우드 격언이다.

그러나 때로는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콘셉트도 등장한다. 성공 가능성이 거의 확실히 점쳐지는 콘셉트 말이다. 적어도 기획의 방향성과 인적 구성, 시기적 특성 등에 있어 모두 맞아 떨어지는 콘셉트다.

이런 ‘100% 짜리 콘셉트’가 드디어 한국에서도 등장했다. 한국영화 뉴웨이브 1세대 신철이 제작하는 ‘로보트 태권V’ 실사판 기획이 그것이다. 아무리 대범하고 정교하더라도 70?80%짜리에 불과하던 기존 한국 상업영화 기획과 크게 다르다. 흠잡을 곳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지난해 예시됐던 ‘로보트 태권V’의 미디어믹스 전략은 꽤나 위험해 보였다. 일단 새 태권V 애니메이션을 기획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로 보였다. 거대 로봇 애니메이션 시장은 이제 종주국 일본에서조차 오타쿠 시장으로 흡수된 지 오래다.

현재 유소년층은 거대 로봇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에 열광할 중장년 남성층은 더 이상 영화 장르의 주요 관객층이 아니다. 이 밖에 각종 부대사업들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한국은 대중문화 상품의 부대사업, 즉 2차 시장 자체가 희미하다. 전반적으로 미국이나 일본의 성공 사례를 한국으로 직수입시켰을 때 어떤 부작용이 나오는지에 대한 교과서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거대 로봇 실사판은 이야기가 다르다. 애니메이션 범주를 벗어났기에 성인 관객층의 ‘벽’을 허물 수 있다. 점차 키치적으로 변해가는 대중의 비주얼 스펙터클 선호 취향에도 꼭 맞는다. ‘트랜스포머’의 전 세계적 대성공이 이를 입증해 준다.

다만 언제나 ‘시기’가 문제였다. 할리우드 트렌드를 인식해봤자, 한국이 동일 콘셉트 콘텐츠를 만들어낼 때쯤이면 유행은 이미 끝나버리고 B급 영화 시장으로 주저앉게 된다. 그래서 한국은 ‘유사 상품’을 만들어내기보다 ‘틈새 상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러나 ‘로보트 태권V’ 실사판은,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지 몰라도, 2009년 하반기 개봉을 예정하고 있다. ‘트랜스포머’ 속편이 여름에 등장하고 난 뒤, 그리고 현재 기획중인 ‘백수왕 고라이온’과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실사판이 등장하기 전이다. 아직 유행이 끝난 시점이 아니다. ‘로보트 태권V’는 새롭게 열린 거대 로봇 실사판 시장에 ‘트랜스포머’ 이후 처음 등장하는 콘텐츠가 된다.

이런 쾌거는 사실 ‘우연히’ 이뤄졌다 봐야한다. ‘로보트 태권V’ 실사판 기획은 ‘트랜스포머’로 거대로봇 시장이 입증되기 전부터 기획되던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무모한 기획이었다. ‘기동전사 건담’ 실사판 기획 등은 이미 웃음거리로 전락해있던 때였다. 일본의 ‘철인28호’ 실사판은 처참히 실패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시대착오적 혹은 시장착오적이었던 기획이, 불과 몇 개월 사이에 가장 뜨거운 시장으로 변모해버렸다.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기획을 무너뜨리지 않았던 ‘로보트 태권V’는 확실히 운이 좋다.

이 기획의 뛰어난 부분은 또 있다. 감독 선정의 문제다. 원신연 감독은 가장 적절한 선택이다. ‘가발’, ‘구타유발자들’, ‘세븐데이즈’를 쓰고 감독한 원신연 감독은, 정확히 말해 별다른 개별적 스타일은 갖지 않은 감독이다. 비주얼 스타일리스트로서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제의식을 파고드는 집요함과 섬세함도 찾아보기 힘들다.

원신연 감독의 장기는 철저한 구성력이다. 낭비 없는 경제적인 연출을 꾀하고, 전체적인 영화의 호흡구조, 완급구조, 플롯진행과 구성에 능숙하다. 딱딱 맞아떨어지는 스위스시계 연출(세븐데이즈)도 가능하고, 구성과 호흡을 무너뜨리는 비균질적 실험(구타유발자들)도 해보았으며, 빽빽한 구성을 포기하고 고의적으로 여백을 남기는 무드피스 연출(가발)에도 재능을 보여줬다.

이런 점에서 원신연 감독은 ‘블록버스터 감독’으로서 꼭 들어맞는 장인이다. 개성을 고집하지도, 장난기가 넘치지도 않는다. 대신, ‘정확’하다. 목표한 구조물을 만들어낸다. 블록버스터 감독을 선정할 때 최악의 선택이 비주얼 스타일리스트의 선택이다. CF, 뮤직비디오 출신 감독들 말이다.

어차피 영화가 팔아먹는 특수효과는 특수효과 전문팀에서 담당한다. 비전은 제작자가 제시하고, 시각적 쾌감은 전문팀이 고도의 연구 끝에 마련하고, 감독은 영화의 전반적 완성도를 챙기는 게 맞는 구조다. 할리우드조차도 종종 저지르는 비주얼과 인테그리티의 선후위 오류를 신철은 분명히 피해간 셈이다.

한편 ‘로보트 태권V’ 실사판은 설정 자체도 성공적이다. 일단, 기자회견에서 공개된 30초짜리 영상은 태권V가 서울 테헤란로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기자회견 중에는 아예 “남산 꼭대기가 날아가고, 한강 다리가 무너지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언급했다. 이것이 정답이다.

모든 거대 괴수물, 거대 로봇물이 가야할 길이다. 이런 종류의 팬터지·SF는 현실과의 밀착성에서 오는 괴리로 대중을 잡아끈다.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사적 공간이 공적 공간화 된다는 것, 나아가 자신의 일상적 공간에 비일상적 상황이 끼어들어 생기는 쾌감이다.

그래서 ‘킹콩’은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스케이트를 탔고, ‘고질라’는 곧 죽어도 현대 도쿄 시가지를 습격했다. 어딘지 짐작조차 불가능한 ‘제3의 공간’에서 건물 무너뜨리고 도로 밟아봤자 이런 효과가 나올 리 없다.

이런 설정은 또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로보트 태권V’ 실사판은 온전히 ‘한국화’된 버전이라는 것이다. 미국시장 먹는답시고 미국 배경에 미국 배우들, 영어로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200억 원이라는 거대제작비가 소요되더라도, 국지적 밀착성에 집착했다. 당연한 일이다.

사실 미국 시장을 제외해 버리면, 세계 각국은 애초 자막 읽는 일에 익숙하며, 해외 인물들이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사회현실 속에서 기능하는 모습에 어색해 하지 않는다. 미국 시장이라는 ‘망령’만 빼버리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정말로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트렌드’만 할리우드 최신의 것을 취한다면, 나머지는 지극히 한국적이어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유리하다. 일단 한국 시장에 맞도록 구성돼 국내 흥행에 수월하다. ‘극미(克美)’를 골자로 한 애국심 마케팅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

이 밖에도 ‘로보트 태권V’ 실사판은 장점이 많다. ‘한국 특수효과 기술력에 할리우드 전문인력의 가이드’라는 기술적 입장이 그렇다. 국내 기술력 향상 면에서도 좋고, 기술적 요소에까지 굳이 ‘100% 한국기술’이라는 식의 민족주의를 덧씌우지 않아 더 효율적이다.

태권V 디자인도 제대로 재구성됐다. 태권V 오리지널은 어쩔 수 없이 일본 ‘마징가Z’의 카피 족쇄를 벗어나기 힘들다. 30초짜리 영상에서 공개된 새 태권V 디자인은 기존 태권V에 근간은 두되 마징가Z 카피는 충분히 벗어날 수 있도록 교묘히 만들어졌다. 노스탤지어를 보장하면서도 비판은 피해갈 수 있다.

물론, 서두에서 언급했듯, 기획만으로는 아무것도 분명히 말할 수 없다. ‘언니네 이발관’ 노래가사처럼, 어제의 ‘기적의 소년’은 오늘 ‘바보’가 되고, 그 반대도 쉬 이루어지는 게 대중문화산업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로 지금, ‘로보트 태권V’ 기획은 ‘기적의 소년’이 맞다는 것이다. 결과가 어찌됐건, 이처럼 뛰어난 기획이 많아질수록 한국영화계는 그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반드시 희망이 있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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