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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내가 그린 건 콤플렉스의 산물 내 학력, 사실은 고졸”

venhuh 2008. 1. 18. 22:43

“여태 내가 그린 건 콤플렉스의 산물 내 학력, 사실은 고졸”

2007년 7월 18일(수) 오후 7:22 [중앙일보]

 

[중앙일보 양성희.김성룡] “내가 골프광입니다. J골프(중앙방송 케이블·위성)를 보면서 발톱을 깎다가 살덩이를 뭉텅 잘라냈다니까. 거기에 술이 원수지. 상처가 덧나서 오늘 아침엔 병원까지 갔다 왔습니다.” 양재동 그의 화실에 들어서자 절뚝거리는 그가 악수를 청한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다. 그 자리에서 직접 사인을 한 명함을 건넨다. 스타만화가다운 풍모다. 이현세(52)가 돌아왔다. 골프만화 ‘버디’(중앙북스)와 함께다. 스포츠신문에 연재 중인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 ‘공포의 외인구단’ ‘지옥의 링’ ‘아마게돈’ 등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으나 음란성 시비로 6년여 지루한 법정싸움을 벌인 ‘천국의 신화’ 이후 좀처럼 붓을 들지 않았던 그다. 승소 판결(2003) 이후 활동의 중심도 창작보다 외부에 맞춰졌다. 한국만화가협회장·세종대 교수 등 직함도 많았다. “‘버디’를 계기로 보다 왕성하게 활동하겠다”는 그는 “예전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으로 만화를 그렸다면 이제는 그저 재미있어서 만화를 그린다는 게 달라진 점”이라고 말했다. “사실은 고졸인데 지난 25년간 서라벌예대 중퇴라고 학력을 속였다”는 뜻밖의 고백도 했다.

# ‘버디’, 골프와 이현세‘버디’는 LPGA 정상에 서는 두 여성 골퍼의 대결을 그린다. 천재형 윤해령과 자수성가형 성미수. 세간에는 미셸 위와 박세리를 모델로 했다는 말도 나돈다. 드라마에 실전 골프레슨까지 곁들인 본격 골프만화다.

“골프는 거부감이 많은 스포츠지요. 처음엔 나도 그랬는데 한 10년간 치다 보니까 말 할 수 없는 매력이 있어요. 가장 넓은 구장에서, 가장 좁은 홀 안에, 가장 작은 공을 넣는 스포츠입니다. 아침에 됐다가도 저녁에 안되기도 하죠. 프로세계 막후의 피 말리는 경쟁은 일반사회 못잖아요. 알아갈수록 인생하고 똑같구나 싶어요. 골프만화라기보다 골프를 통한 인생만화라고 보시면 됩니다. 실존 선수들을 모델로 삼은 건 아니지만 굳이 나누자면 해령은 미셸 위·박지은· 한희원, 미수는 박세리·김미현·최경주 같은 선수를 대변하죠.”‘버디’는 그의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마초 까치’로 유명한 그의 만화로는 이례적으로 강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부드러운 남자 구현우가 ‘엄지’ 역할을 해낸다. 만화로는 최초로 PPL(Product Placement·상표 노출 협찬)도 선보였다.

“실제 남녀관계가 많이 달라졌잖아요. 나중에 이걸 드라마로 만든다면 여자 얘기여야 현실감 있고 거부감도 덜할 거라고 봤어요. PPL도 여자선수인 게 유리했고요. 어차피 작품이라기보다 철저하게 기획된 상품이니까요.”(참고로 그는 싱글 플레이어로, 상당한 골프 실력을 자랑한다).

# ‘원 소스 멀티 유즈’ 의 원천 콘텐트 만화그는 ‘버디’를 “만화라는 장르가 원 소스 멀티 유즈 영상산업의 원천 콘텐트로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실험해보는 작품”이라고 했다.

“출판만화가 만화산업의 중심이고 만화가 만화로만 존재하던 시대는 끝났지요. 반면 원천 콘텐트로서 만화의 역할은 커지고 있어요. 일본 ‘망가’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 할리우드 속편 영화도 전부 만화 원작이잖아요. 국내에도 만화원작 영화·TV 드라마가 나오고, 할리우드가 우리 만화를 원작으로 사들이는 등 가능성은 커지고 있어요. 결국 중요한 것은 그림보다 이야기죠. 예전처럼 도제 시스템에서 테크닉만 배우는 게 아니라 학교 교육을 통해 ‘왜 만화인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작가들이 나오는 것이 의미 있는 변화입니다. 앞으론 그림보다 이야기를 잘 만드는 작가들이 대접받을 겁니다.”한동안 붓을 내려놓았던 그는 요즘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다. 이달 중 시놉시스를 마무리하는 ‘2030 프로젝트’도 그중 하나다. 정부 지원 속에 2030 독자를 겨냥해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1500원짜리 ‘캐릭터 시리즈 만화’다.

“일본식 만화잡지 모델은 실패했고 이번에는 구미 모델입니다. 가령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한번은 이현세가, 한번은 황미나가 그리는 식이죠. 작가 중심인 일본에서는 작가가 죽고 나면 그 시리즈가 폐기되지만 미국 디즈니 등에선 캐릭터가 영원히 살아 부가가치를 창출하잖아요. 원천 콘텐트가 될 수 있는 우리 캐릭터를 브랜드화하자는 거지요.”# ‘천국의 신화’ 그리고 콤플렉스를 넘어80년대 공전의 히트작 ‘공포의 외인구단’ 이후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천국의 신화’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결국 승소했지만 지루한 싸움 끝에 “40대를 잃었다.” 가장 큰 문제는 완성된 만화의 밀도. “인간의 역사를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던 30대에 기획하고 40대에 그린 만화예요. 이걸 순리를 받아들이는 50대에 완성하니, 앞 뒤가 딴 얘기가 된 거죠.”생각보다 후유증은 깊었다. “다시는 만화를 못 그릴 것 같았어요. 협회장이나 학교 등 작품 외적인 일에 매달렸죠. 하지만 역시 제 자리는 창작입디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만화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 동화작가로 살고 싶어요.”그에게 50대는 각별한 듯했다. “제가 참 모나서 매를 많이 맞는 편이었어요. 소재도 그림도 갈등구조도 그랬죠. 한때는 제 콤플렉스를 풀려는 열망으로 만화를 그렸어요. 까치라는 인물 자체가 제 열등감의 소산이었고, 까치의 성공으로 콤플렉스를 풀었죠. 하지만 이제는 욕망·성공·열망 이런 것보다 그저 내가 재미있는 일을 위해 만화를 그린달까요.”얼핏 내비친 대로 콤플렉스는 그의 만화세계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일생이 콤플렉스와의 싸움이었어요.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가 안 계셨고, 월북한 삼촌 때문에 연좌제에 시달렸죠. 색약이라 미대 진학이 좌절됐고요.”비단 그 개인뿐이랴. 정치적 억압기인 80년대 까치는 현실에선 위축된 ‘강한 남자’의 로망을 건드렸다. 낙오자로 몰린 이들이 화려하게 부활한다는 ‘공포의 외인구단’은 소시민의 콤플렉스를 정확하게 조준했다.

“제게 남은 마지막 콤플렉스가 학력이에요. 보다 정확히는 학력을 부끄러워한 마음이죠. 친구들 따라 6개월간 도강한 게 전부인데, 만화가 히트한 다음에 사람들이 ‘어느 대학 나왔느냐’고 묻는 거예요. 당시만 해도 만화가라면 한 수 내려보는 풍토라서 ‘중퇴’라고 거짓말했죠. 이 사실이 지난 25년간 저를 괴롭혔어요. ‘버디’ 3권 부제가 ‘핸디캡’인데 작가 서문에서 이 사실을 밝혔습니다. 핸디캡·콤플렉스란 결국 자기를 옥죄고 구속해서 스스로를 영원히 약자로 만든다는 거죠.”이현세는 80년대 성인만화 시장을 연 개척자다. 또 허영만과 함께 국내 만화계의 양대 산맥을 이뤘다. 영화와 드라마로 옮겨진 ‘공포의 외인구단’ ‘아마게돈’ ‘폴리스’ 등은 만화계 원 소스 멀티 유즈의 선구자였다. 만화는 그저 애들이나 보는 불량품이라는 인식 대신, 대학생도 보는 문화 콘텐트이자 산업이라는 것도 그로 인해 가능해졌다.

후배 만화가 양영순은 필생의 라이벌인 그와 허영만을 흥미롭게 비교했다. “이현세의 만화가 사슴 모가지를 툭 쳐서 피가 뚝뚝 흐르는 느낌이라면, 허영만의 만화는 사슴을 사시미로 곱게 떠서 팩에 밀봉한 느낌이다.”안타깝게도 이현세가 ‘40대를 잃어버리는 동안’ 허영만은 최고 현역을 고수했다. 이제 날 선각 대신 할아버지 만화가의 푸근함을 보여주겠다는 그의 새로운 도전이 궁금하다.

글=양성희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양성희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cooli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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